칼럼니스트: 김진석 작가

지금으로부터 꽤나 오래된 얘기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유럽은 자동차 선진국이며 겉치레에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가볍고 실용성이 좋은 소형차를 선호하고 그에 비해 자동차 산업의 역사가 짧고 급격한 모터라이제이션을 겪은 우리나라는 무분별하게 대형차를 선호한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소형차가 강세였던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이는 단순히 선진국 여부나 자동차 산업의 역사와는 별개로 모빌리티 인프라 특히 도로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산업화와 도시 개발이 현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동차 도로가 넓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큰 차를 타기 용이합니다. 반면 유럽은 마차가 다니거나 자동차의 초창기 시절 만들어진 도로가 많아 도로의 폭이 좁은 편이며,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 도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 도심들 대부분은 중심가의 주차비가 매우 비싸며, 노면 주차 시 매우근접해서 주차해야 하며, 주차/출차 시 앞차와 범퍼가 닿는 것은 예사 일입니다. 아무리 유럽인들이 덩치가 크다 해도 이런 환경에서는 큰 차보다는 작은 차가 여러모로 더 활용도가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도로폭도 비교적 넓고 신도시가 많아 8차선 도로를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국토교통부에서 지속적으로 주차단위구획 최소 기준을 상향해오면서 상대적으로 주차 환경 또한 지속적으로 나아져서 펠리세이드, 카니발같은 큰 차를 가지고 다니기에도, 주차하기에도 큰 불편함이 없는 편입니다. 다시 말해 유럽과 한국에서 선호되는 차량의 크기가 다른 것은 유럽인들이 살아가는 환경과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빌리티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과 모빌리티 인프라

모빌리티 인프라는 선호하는 자동차의 크기 등 자동차 문화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K-POP 산업에서 동남아시아 시장은 매우 중요한 시장입니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소비자들은 일본, 미국 소비자들에 비해 인당 소비하는 금액이 크지는 않지만 대신 막대한 인구수를 기반으로 유튜브, 틱톡 등 콘텐츠의 조회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청소년들 모두가 그렇긴하지만 동남아시아의 경우 특히 더 여가 시간에 모바일로 콘텐츠를 즐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즐기는 주요 콘텐츠 중 하나가 K-POP이구요.) 이들의 모바일 콘텐츠 이용 빈도가 높은 것에는 모빌리티 인프라도 일정 부분 영향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여행을 가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듯이 동남아시아 국가는 상대적으로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편입니다. 해당 지역에서 이동 수단으로 많이 쓰이는 오토바이는 청소년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이러한 환경에서는 청소년들이 거주지를 벗어나 중심지로 나가서 모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하교한 이후의 여가 시간에 상당 부분을 모바일 콘텐츠 소비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죠. 반면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다면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핫플레이스가 곳곳에 생겨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문화적 중심지에 나가서 놀기도 쉬울 것 입니다. 아무리 모바일 콘텐츠가 즐겁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과 만나 노는 즐거움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K-POP 등 문화 강국이 될 수 있는 데에는 어쩌면 저렴한 대중교통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청소년들도 쉽게 서울에 나갈 수 있고, 강남, 홍대, 명동에서 최신의 문화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K-POP 스타들이 지하철역 등 대중교통에서 우연히 캐스팅됐다는 걸 보면 사람의 이동이 많을수록 좋은 재능을 산업과 자본이 발견하기 쉬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모빌리티 인프라=사회적 선택의 누적

이처럼 모빌리티 인프라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빌리티 인프라는 사회 변화의 축적과 정책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최근 몇 년간 자율주행, UAM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서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과 MaaS로 대표되는 기존의 모빌리티 인프라의 서비스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KTX, GTX 등 광역 교통이 확대되면서 점점 더 저렴한 비용으로 중심지에 더욱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지금까지의 모빌리티 인프라가 그래왔듯이 그냥 그럴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택의 축적에 따라 그 모습과 발전 속도는 굉장히 다양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빌리티는 현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우리 삶 가까이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삶 속의 모빌리티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나요? 

인간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시작해서 전 대륙으로 퍼진 것을 보면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삶의 범위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DNA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온라인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우리의 삶은 현실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온라인의 삶이 아무리 다양해지고 중요해지더라도, 또 비전프로와 같은 AR 기기가 궁극적으로 발전하더라도 진짜를 경험하는 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우리가 더 많은 곳을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은 여가 측면에서 더 중요해질 수 있겠네요. 또한 코로나19 시기 원격 근무가 확산되고, 메타버스가 주목받았지만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의 만남과 교류는 온라인 상에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더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모빌리티의 발전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쩌면 모빌리티의 발전은 계속 온라인에서의 시간이 늘어나는 우리의 삶의 무게추를 오프라인으로 더 기울이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빌리티 발전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칼럼니스트 소개

김진석: 자동차 회사의 마케터로서 일했으며, 현재 모빌리티 산업의 사업 기획자로서 일하고 있다. 네이버 포스트  카레시피의 콘텐츠를 담당했으며, 다음자동차 등에서 컬럼을 연재했었다.